영화평도 리콜이 되나요?
<영화평도 리콜이 되나요>는 영화를 좋아하는 다섯 사람이 영화 관련 글을 쓴 묶음집이다.
이 다섯 명의 시네필들은 처음 접한 영화는 무엇이었으며 그 계기는 어떠했는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지, 왜 영화 세계에 발을 들이밀었으며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등을 마치 수다 떨듯 글로 기록한다.
처음 이 책을 대여할 때 나는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영화쟁이(?)들의 에세이 수준이었다. 솔직히 좀 실망스러운 부분이었는데, 그래도 다섯 명 중 김도훈 기자의 글이 정말 재밌게 잘 읽혀 그의 파트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영화 기자는 “글 잘 쓰는 오타쿠”라고 생각하는데, 김도훈 기자는 역시 기자여서 그런지 글이 다르더라.
글쓴이들은 대부분 나보다 열 살 정도 윗 세대인 것 같다. 그들이 책에서 언급하는 영화들이 나에게 영 친숙하지 않고, 그들이 향유했다고 밝힌 문화도 나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피카디리같은 영화관은 잘 모른다. 서울극장만 안다. 담배연기 가득한 동아리방, 홍콩영화 전성기도 나는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라떼 이야기엔 공감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얼마나 영화에 푹 빠져있는지, 얼마나 열정적으로 덕업일치의 삶을 즐기고 있는지는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그 이유를 한 번씩 상기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테면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예상치 못한 계기로 인생의 도전을 시작하고, 그럼으로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과정을 통해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는 흐름이 내 인생의 가치관과 매우 흡사했다. 벤 에플릭의 연기도 좋았고 미국과 아일랜드를 넘나드는 배경 또한 매혹적이었다.
- 버킷 리스트 – 나이든 노인들이 하고 싶었지만 접어두었던 일들을 버킷 리스트로 작성해 실행하는 이야기 또한 내 인생의 가치관과 맥을 같이한다. 짧은 인생, 아름다운 꿈과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살아야지, 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와 같이 이 영화도 배경이 아름다워 마치 내가 함께 여행하는 것 같았다.
- 블루 재스민, 미드나잇 인 파리 – 아름다운 배경, 매력적인 등장인물들. 격한 스토리라인이 없이 잔잔해도 그냥 좋았다.
- 아델라인 – 시대와 함께 나이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영화 주제에 200% 공감하며 영화에 푹 빠져들었었다. 적당히 가벼우면서 적당히 생각할 주제를 주는 이 정도 무게감의 영화가 좋다.
- 그린북 – 흑인과 백인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백인이 당시 차별받던 흑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스토리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와닿았다. 영상미, 영화 말미의 따뜻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압권.
이 중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이 책의 글쓴이 중 한 명이 추천한 영화다. 반면 내가 5번 이상 본 라라랜드는 한 글쓴이가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는 영화’로 꼽았더라. 약간 민망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엔 공통점이 있다. 전세계 멋진 곳을 배경으로 해 영화를 보는 내내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 들고, 그러면서 적당히 시사점과 여운을 남기고, 그러면서 “현재를 살자, 도전하자”라는 내 좌우명과 일맥상통하는 영화들. 이런 걸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참 좋네.
결국 나에게 이 책은, 영화광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방식에 대한 공감보단,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떠올려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 70년 역사의 잡지도 디지털, 온라인 시대에 더 이상 수익률을 기대하기 힘들어 폐간을 결정한 시기에 월터는 <라이프> 최고의 포토그래퍼가 숨겨놓았다는 ‘삶의 정수’가 담긴 결정적 사진 한 컷, 마지막 호 표지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 나서며 인생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판타스틱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의 끝, 월터가 그토록 찾아다닌 사진의 정체는 바로 16년간의 근무 기간 중 어느 별스럽지 않은 평범했던 하루, 잡지사 건물 앞 화단에 앉아 햇빛에 필름을 살펴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뉴욕 거리를 걷다가 가판대에서 자신의 모습이 프린트된 표지를 보는 월터를 따라 나도 엉엉 울었다. 마지막 호로는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선택이다.
- 숀 오코넬은 한 권의 종이 잡지가 발행되기까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월터에게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박수를 쳐준다.